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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동기회

자유게시판 부친상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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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형익
댓글 0건 조회 689회 작성일 09-01-0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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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지난 년말에 부친상을 맞아 가 보지도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부친상을 감당해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홈피 공지사항에 줄줄이 이어지는 부친, 모친상 부고를 보면서
이제는 영락없이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전환기에 태어난 우리의 아버지들은 참으로 무섭고 강한 아버지들이 아니었는가!
이제 그 분들이 다 가고 등신같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내 차례가 다가온 것이다.
외국에 살면서 아버지의 상을 멀리서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음이 너무나 죄스러워, 만 천하에 그 동안의 불효를 고하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 글을 올려드린다.
나의 불효, 너의 불효를 함께 생각하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님 전상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벌써 마음에 슬픔과 아픔이 느껴집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해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수없이 설교를 하는 제가, 아버지 살아계실 때 가장 제대로 못한 아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지 못한 불효자로 살았는데, 이제 아버지의 존재를 깨달을만하니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황망하기만 합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신 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시고 떠나셨으니. 이제부터는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위로와 사랑 속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똑똑한 어머니를 만나 한 번도 남편으로서의 존경을 받아보지 못한 채 언제나 무시당하고 언제나 미움만을 받아오신 아버지!
그동안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식들한테서 조차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90을 넘긴 노쇠한 몸으로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실 때 얼마나 허무하셨습니까?
이제야 그 쓸쓸하셨던 마음을 헤아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솔직히 저는 남들처럼 아버지에 대한 정 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거북한 마음이 너무나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릴 때 제가 교회를 나간다고 그렇게 분노하며 몽둥이로 핍박하던 아버지!
어머니를 끊임없이 학대하며 무서운 폭력을 휘두르시던 아버지!
술만 취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집안을 쑥밭으로 만드시던 아버지!
언제나 실패하고 언제나 사기만 당하고 언제나 손해만 보시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항상 가장으로 군림하며 가차 없이 손을 들어 식구들을 윽박지르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아래서 살아오는 동안 솔직히 우리 5남매의 가슴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밖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마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밴쿠버에서 살 때 토피노에 갔다가 아버지가 다리에 힘이 없어서 낙엽위에 주저 앉아버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황급히 달려가서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그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마음들이 순간적으로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강하던 아버지의 힘은 다 어디로 가고, 경련하는 손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시던 모습이 얼마나 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제 마음 속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생동안 어떻게든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아들이 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미운 행동만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에서 방앗간을 두 개나 운영하던 시절, 날마다 아버지가 방앗간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유령같이 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시던 저녁 무렵이 떠오르고,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갈 때 허리 춤에 매달려 있던 고기망태기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물을 캐러 오대산을 헤매던 생각과, 방학 때 시골집에 들어서면 “왔냐?” 하시며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아버지의 자상한 사랑을 한 번 도 받은 적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께서 나를 무릎에 눕혀놓고 저의 귀지를 파면서 안경을 추스르던 모습도 있었더군요.
녹이 쓴 커다란 가위로 저의 발톱과 손톱을 잘라주신 적도 있었군요.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들을 미워하기만 하신 줄 알았는데, 우리를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신 적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목사가 되어 아버지를 예수님께 인도하고 마침내 내 손으로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세례를 베풀던 순간이 기억되십니까?
그때 저는 마침내 이 완악한 영혼을 내가 건졌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드디어 나는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하였다! 드디어 나는 아들의 의무를 다 한 떳떳한 목사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교회에 나오시는 아버지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여전히 기쁨과 감사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교회를 비난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말씀하시는 모습만 보여주셨지요.
그때마다 저는 어떻게 이런 아버지 밑에서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겠는가! 남들은 3대, 4대째 목사라고 자랑인데 나는 이게 뭔가? 자조를 하면서 나 같은 불행한 목사가 없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못되고 부끄러운 생각인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모든 이유가 바로 저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과연 훌륭한 목사답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닫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건방진 생각만 했으니 얼마나 못된 아들입니까?
아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으실 때 얼마나 마음이 비참하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아들 목회를 도울 양으로 말없이 저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아주시던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
그 동안 저가 아버지를 무시하고 가슴 아프게 한 일들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자식이 되어 용돈도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언제나 빼앗기만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듬뿍 용돈을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것 역시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용돈은 커녕 돌아가시는 날 임종은 물론 영결의 자리에 조차 참석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으니 잠으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관재 목사가 나를 대신해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축복해 주고,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이 마지막 가시는 길을 성대하게 마련해 드렸다고 하니 그나마 위로를 받습니다.
부디 천국에서 모든 섭섭함을 다 잊으시고 생전에 누리시지 못하셨던 평안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드려야 했을 말씀을 이제 돌아가신 아버지 영전에 바치면서 못된 아들이 머리를 숙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08년 12월 26일 둘째 아들, 김형익 불초소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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