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한국이 좋다
페이지 정보

본문
우리 아버지의 고향은 강릉 성산이다.
지금도 성산에는 우리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고 5대조까지 모신 선산이 주위에 즐비하다. 그 마을 끝머리에 대관령과 왕산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바로 그 개울가에 직전 조부모의 산소가 있다. 어릴 때 그 산소자리를 명당이라고 설명하는 할배들의 소리를 들었는데, 왈 "후손들이 세계로 나가서 이름을 날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효험이 있는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오대산에 있는 바람에 아버지가 거기서 일자리를 얻어 모두가 영세로 이사를 했고 그 후 우리 형제들은 일평생 객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지금 캐나다에서 외롭게 떨고 있고 내 여동생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고 내 형과 막내동생도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수년동안을 헤매다가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예언과는 달리 이름을 떨치기는 커녕 외로움과 생활고에 떨고 있는 것이다.
객지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슬픈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이번에 한국을 정말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다니고 돌아온 지금 나는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한국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역시 조선놈에게는 조선 땅보다 더 좋은 곳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힌한 셈이다.
오랜만에 권혁인이 출판기념회에서 동창들을 많이 만나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새까만 차를 몰고 성공을 자랑하듯 나타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여전히 찔룩거리기 좋아하는 강릉사람들의 정서를 생각하면서 정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가 대단한 친구들로 보였다.
심재윤이와 권영민이의 출세도 놀랍다. 전무와 상무님이라니! 그렇게까지 출세할 줄 몰랐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녀석들과 소주를 한잔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친구들의 지갑을 빼앗았더니 재윤이가 하는 말,
"김형익이의 저 뻔뻔스러움 앞에 내가 할 말이 없다"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들의 위로가 마치 백만원군이라도 얻는 느낌이었다.
전군표를 면회가던 날 나는 그의 석방을 위해 청와대 수석을 만났다.
힘이 되든지 안되든지 어쨋든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표를 만났을 때 군표는 내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조명현이와 그의 부인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았다. 정말 좋은 친구라고.....
강릉에 가서 시간이 없어 나의 생존을 위해 최명희 시장의 도움을 요청했다.
명희는 흔쾌하게 적극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시중에 다니면서 나는 그의 재선을 확신하는 여론을 확인했기에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웠다. 나도 그의 재선을 위해 기도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다니느라고 정신없었지만 한가지 마음에 뚜렸이 각인 되는 꺠닫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이토록 소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기독교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뜻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한국을 방문하면서 고등학교 때 비록 내 성격과는 맞지 않아서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친구들마져 오히려 더 놀라운 인격들과 모습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임을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친구들이여!
지금 자네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어릴 때 학교친구 가리지 말고 잘 사귀라고 가르치게.
교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늙어보이지 않은 김성래 친구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늙수레 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나는 그 얼굴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왜 그때 고등학교 다니면서 이들과 함께 더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아쉬움으로 머리를 스쳤다.
10기 동기회에 들어오는 친구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친구의 즐거움을 누리자.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 지갑을 재윤이나 영민이 지갑을 뺏는 것처럼 빼앗겠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푸근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 남은 인생이 더욱 풍성하지 않겠느냐?
여기는 언제나 선진국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캐나다다.
과연 우리 한국이 따라 갈 수 없는 대단한 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호하게 말 할 수 있다.
한국처럼 좋은 곳이 없다고.
친구들과 벗하여 한잔 권하고 받을 수 없는 객지 중의 객지에서
나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서러워하고 있다.
누구 소주잔 들고 여기 찾아 와 줄 친구 없냐?
"목사도 친구하고 소주 한 잔 먹는 것은 괜찮아, 자! 마새" 하면서 말이다.ㅎㅎ
지금도 성산에는 우리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고 5대조까지 모신 선산이 주위에 즐비하다. 그 마을 끝머리에 대관령과 왕산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바로 그 개울가에 직전 조부모의 산소가 있다. 어릴 때 그 산소자리를 명당이라고 설명하는 할배들의 소리를 들었는데, 왈 "후손들이 세계로 나가서 이름을 날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효험이 있는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오대산에 있는 바람에 아버지가 거기서 일자리를 얻어 모두가 영세로 이사를 했고 그 후 우리 형제들은 일평생 객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지금 캐나다에서 외롭게 떨고 있고 내 여동생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고 내 형과 막내동생도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수년동안을 헤매다가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예언과는 달리 이름을 떨치기는 커녕 외로움과 생활고에 떨고 있는 것이다.
객지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슬픈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이번에 한국을 정말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다니고 돌아온 지금 나는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한국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역시 조선놈에게는 조선 땅보다 더 좋은 곳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힌한 셈이다.
오랜만에 권혁인이 출판기념회에서 동창들을 많이 만나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새까만 차를 몰고 성공을 자랑하듯 나타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여전히 찔룩거리기 좋아하는 강릉사람들의 정서를 생각하면서 정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가 대단한 친구들로 보였다.
심재윤이와 권영민이의 출세도 놀랍다. 전무와 상무님이라니! 그렇게까지 출세할 줄 몰랐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녀석들과 소주를 한잔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친구들의 지갑을 빼앗았더니 재윤이가 하는 말,
"김형익이의 저 뻔뻔스러움 앞에 내가 할 말이 없다"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들의 위로가 마치 백만원군이라도 얻는 느낌이었다.
전군표를 면회가던 날 나는 그의 석방을 위해 청와대 수석을 만났다.
힘이 되든지 안되든지 어쨋든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표를 만났을 때 군표는 내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조명현이와 그의 부인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았다. 정말 좋은 친구라고.....
강릉에 가서 시간이 없어 나의 생존을 위해 최명희 시장의 도움을 요청했다.
명희는 흔쾌하게 적극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시중에 다니면서 나는 그의 재선을 확신하는 여론을 확인했기에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웠다. 나도 그의 재선을 위해 기도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다니느라고 정신없었지만 한가지 마음에 뚜렸이 각인 되는 꺠닫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이토록 소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기독교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뜻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한국을 방문하면서 고등학교 때 비록 내 성격과는 맞지 않아서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친구들마져 오히려 더 놀라운 인격들과 모습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임을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친구들이여!
지금 자네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어릴 때 학교친구 가리지 말고 잘 사귀라고 가르치게.
교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늙어보이지 않은 김성래 친구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늙수레 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나는 그 얼굴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왜 그때 고등학교 다니면서 이들과 함께 더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아쉬움으로 머리를 스쳤다.
10기 동기회에 들어오는 친구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친구의 즐거움을 누리자.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 지갑을 재윤이나 영민이 지갑을 뺏는 것처럼 빼앗겠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푸근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 남은 인생이 더욱 풍성하지 않겠느냐?
여기는 언제나 선진국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캐나다다.
과연 우리 한국이 따라 갈 수 없는 대단한 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호하게 말 할 수 있다.
한국처럼 좋은 곳이 없다고.
친구들과 벗하여 한잔 권하고 받을 수 없는 객지 중의 객지에서
나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서러워하고 있다.
누구 소주잔 들고 여기 찾아 와 줄 친구 없냐?
"목사도 친구하고 소주 한 잔 먹는 것은 괜찮아, 자! 마새" 하면서 말이다.ㅎㅎ
- 이전글4월8일 전군표 아들 결혼식 10.03.14
- 다음글동기모임안내 (03월13/토)...목동야구장 10.03.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