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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달갱이 이야기<1>

작성자 백충기

등록일 2019.09.10

조회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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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달갱이 이야기<1> 


6.25사변 후 금광평(金光坪)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지원하여 조직된 개척대(開拓隊)는 북 피란민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떠돌이들이 대부분으로, 각성(各姓)바지 동네였다. 처음에는 작은 개울 옆에 나무를 잘라내고 집터를 닦아 기다란 늘레집을 지어서 떠돌이들을 수용했는데 방 한 칸, 부엌 하나씩 나누어 주어 입주를 시켰다. 피란민 수용소 모양의 늘레집은 10 집이 함께 살도록 지은 집이니 상당히 기다란 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자 다시 단독주택을 지어서 분양했는데 기역자집으로 윗방, 아랫방, 건넌방이 있는 제법 번듯한 집으로, 늘레집 아래쪽에 10여 호를 줄을 맞추어 따로 지었다. 안땔골(강릉시 남산 밑 동네)에서 이사와 고모네 작은 토담집에 살던 우리는 과수원을 하며 먼저 터를 잡았던 고모부의 주선으로 단독주택 한 채를 배정 받았는데 어떤 조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늘레집이나 단독주택에 살던 사람들은 함경도, 평안도, 영남, 호남 등 각처에서 모여온 사람들이다보니 성씨(姓氏)가 모두 달랐다. (), (), (), (), (), (), ().... 어린 시절, 각 집의 성씨가 모두 다르다고 맨 윗집부터 차례로 손가락을 꼽고 외워대며 웃곤 했는데 우리 집은 위에서 세 번 째 집이었다.

맨 윗집 김씨네는 평안도에서 나온 피란민이었는데 막내 봉식이는 나보다 한 살 위로 나와 단짝 친구였
고 큰 누님 옥순이는 우리 막내누님보다 두어 살 위였던 모양인데 시집을 갈 때 이야기이다. 신부 화장을 하고 연지 곤지를 찍고 앉았는데 이웃 여인네들이 눈을 감으라고 하니 평안도에서는 신부가 눈을 감는 풍습이 없었는지 옥순이 어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지독한 평안도 사투리로
우리 옥수이 죽으라고 눈감겠음메?’
하더라고 동네 젊은이들은 두고두고 옥순이 어머니 사투리를 흉내 내며 웃곤 했다.

우리 윗집 배씨는 함경도 피란민이었는데 닭을 제법 많이 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
아침이면 닭을 들판에 풀어 놓아 먹이를 주워 먹게 하다가 저녁에는 닭장 안에 닭을 몰아넣었는데 30마리는 되었던 것 같다. 사료가 부족했던 때문인지 배씨 아저씨는 개구리를 잡아다가 잘라서 사료와 께 먹이곤 했다. 기다란 막대기 끝에 못을 잔뜩 박은 자그마한 판자를 붙여서는 개울가를 서성거리다가 개구리가 보이면 재빨리 찍어서 옆구리에 차고 있는 깡통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우리 보고도 개구리를 잡아오면 돈을 주겠다고 해서 우리도 깡통을 줄에 메어 옆구리에 차고 어다니며 개구리를 붙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쳐서 기절을 시켜서는 깡통에 집어넣고 했는데 깡통 하나를 채워서 가지고 가면 돈을 주곤 했는데 지금으로 보면 몇 십 원 쯤 되었던 것 같다
. 그걸로 눈깔사탕 사먹던....
배씨는 계란을 팔았던 기억이 없는걸 보면 닭을 길러서 육계로 시장에 내다 팔았던 모양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였던가? 배씨네 닭이 우리 부엌에 들어와 알을 낳으려고 하는 것을 잡아먹었던 기억... 닭서리라고 해야 하나, 닭 도둑질이라고 해야 하나...


평안도에서 피란 나온
40대 중반의, 홀아비인지 총각인지 꺼벙이처럼 생긴 아저씨는 집을 분양한 후 중에 왔기 때문이었는지, 주변머리가 없었던지 마을 뒤쪽 언덕에 땅굴을 파고 거적을 둘러치고 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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